AI가 다 해주는 시대에, 손으로 종이를 만진다는 것
그림도 글도 영상도 AI가 만들어 준다. 그럴수록 손으로 무언가를 세워 보는 시간이 드물어진다. 그 시간에 대해 적었다.
요즘 아이들은 숙제를 AI에게 묻는다. 그림도, 글도, 영상도 몇 초면 나온다. 부모와 교사가 같은 질문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런 시대에 아이는 대체 무엇을 길러야 하나.
답은 좀 역설적이다. AI가 잘하는 일이 늘어날수록, AI가 못 하는 일의 값이 오른다. 그중 하나가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세워 보는 경험이다. 나는 이걸 매일 종이를 다루며 확인한다.
평면을 머릿속에서 세우는 일
펼쳐진 전개도를 보고 완성된 입체를 미리 떠올리는 능력. 거창하게는 공간 지각력이라 부르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모양을 미리 그려 보는 힘이다.
이건 영상으로는 잘 자라지 않는다. 직접 접어 세우고, 어긋난 자리를 손으로 바로잡아야 몸에 밴다. 화면을 넘기는 손가락과 종이를 접는 손가락은 서로 다른 일을 한다.
손끝이 곧 생각이다
손의 정교한 움직임이 뇌를 깨운다는 건 발달 분야에서 오래된 상식이다. 접고, 붙이고, 정확한 자리에 끼우는 동작은 집중과 계획과 문제 해결을 함께 끌어올린다. 스마트폰이 손의 일을 단순한 쓸어넘김으로 줄여 놓은 시대라, 종이 작업의 값은 오히려 올라간다.
인지과학에는 '체화된 인지'라는 관점이 있다.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몸을 움직이고 사물을 다루는 과정과 한 몸으로 굴러간다는 것이다. 손으로 직접 종이를 접어 본 아이가 도형을 더 또렷이 이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머리와 손은 따로 노는 두 기관이 아니다.
실패가 정보가 되는 경험
종이는 한 번에 서지 않는다. 쓰러지면 어디가 무거웠는지 들여다보고 다시 세운다. 이 관찰과 수정의 반복이야말로, AI에게 프롬프트만 던져서는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 흔해질수록, 그 결과물을 어떻게 세울지 생각하는 힘이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그 힘은 종이든 블록이든, 물성을 손으로 다뤄 본 사람에게서 자란다. 거창한 결론은 아니다. 다만 화면 밖에서 종이 한 장을 세워 보는 저녁이,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는 이야기다.
오세기 · PE Studio 대표
2013년 Paper Engineering Studio(구 액션크래프트)를 설립해 지기구조 설계 특허 11종을 보유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2회 수상했습니다. 페이퍼토이·팝업북·오토마타 등 움직이는 종이 구조를 직접 설계합니다.
회사·설계자 소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