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판 교구에는 없는 것 — 학교만의 종이 수업에 대하여
교구는 어디서나 살 수 있다. 그래서 어느 학교나 같은 수업을 한다. 학교만의 종이 교구가 만드는 작은 차이에 대해.
교구는 어디서나 살 수 있다. 그래서 어느 학교나, 어느 학원이나 비슷한 키트로 비슷한 수업을 한다. 나쁜 일은 아니다. 다만 그 수업에는 '우리만의 것'이 빠져 있다.
오래 교육용 종이 작업을 하면서, 나는 교구의 차이가 의외로 작은 데서 온다는 걸 알게 됐다. 학교의 마스코트, 동네의 이야기, 그 학년의 눈높이. 이런 것이 종이 한 장에 들어가면 수업의 공기가 달라진다.
우리 학교만의 것
학부모가 학교를 기억하는 방식은 대개 눈에 보이는 한 장면이다. 시판 키트로 만든 결과물은 그런 장면이 되지 못한다. 어디서나 똑같으니까.
학교 마스코트로 만든 움직이는 종이 인형은 다르다. 첫 수업 한 번이면 아이가 집에 들고 가고, 그날 저녁 사진 한 장이 단톡방에 올라간다. 구조를 짤 때 우리가 신경 쓰는 건 화려함이 아니라, 도형의 내각과 무게중심 같은 원리를 아이가 손으로 먼저 만나게 하는 일이다.
이런 수업을 요즘은 STEAM 교육이라 부른다. 과학(Science)·기술(Technology)·공학(Engineering)·예술(Art)·수학(Mathematics)을 따로 떼어 가르치는 대신, 하나의 활동 안에서 함께 만나게 하자는 흐름이다. 종이 한 장을 접어 캐릭터를 세우는 일에는 그 다섯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도형을 따지는 수학, 무게를 견디게 하는 공학, 캐릭터를 살리는 예술이 한 번의 접기 안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융합이라는 말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움직이면 영상이 된다
교육에서 만든 것이 좀처럼 퍼지지 않는 이유는 결과물이 가만히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가 세운 종이가 그 자리에서 고개를 까딱이면, 부모는 영상을 찍는다. 그 짧은 영상이 학원의 가장 정직한 광고가 된다. 광고처럼 보이지 않아서 더 멀리 간다.
한 번 만들면 오래 쓴다
학교만의 교구는 한 번 설계해 두면 그 뒤로 오래 쓰인다.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이어지고, 재료만 다시 받아 반복할 수도 있다. 교사용 안내까지 함께 정리해 두면 선생님이 바뀌어도 수업은 남는다.
거창한 교육 혁신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어디서나 같은 수업' 대신 '여기서만 하는 수업'을 한 번 만들어 보는 일이다.
오세기 · PE Studio 대표
2013년 Paper Engineering Studio(구 액션크래프트)를 설립해 지기구조 설계 특허 11종을 보유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2회 수상했습니다. 페이퍼토이·팝업북·오토마타 등 움직이는 종이 구조를 직접 설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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