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종이가 아니다 — 평량과 결이 가르는 완성도
종이라고 다 같은 종이가 아니다. 평량과 결을 잘못 고르면 아무리 좋은 설계도 무너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결과가 갈리는 이야기.
설계가 아무리 정교해도, 종이를 잘못 고르면 구조는 무너진다. 13년을 일하며 가장 자주 한 실수도, 가장 많이 배운 것도 결국 재료였다.
평량 — 두께가 아니라 무게
종이의 굵기는 흔히 평량으로 말한다. 1제곱미터당 몇 그램인가를 뜻하는 단위(g/㎡)다. 얇은 내지가 80에서 120 사이라면, 스스로 서야 하는 구조물은 250에서 400을 넘나든다.
무겁다고 늘 좋은 건 아니다. 너무 두꺼우면 접는 선이 갈라지고, 너무 얇으면 제 무게를 못 견뎌 주저앉는다. 움직임을 담을 종이는 '접혀도 갈라지지 않고, 서도 휘지 않는' 그 사이 어딘가를 찾아야 한다.
결 — 종이에도 방향이 있다
종이에는 섬유가 흐르는 방향, 곧 결이 있다. 결을 따라 접으면 선이 매끈하게 잡히고, 결을 거슬러 접으면 자국이 거칠게 일어나거나 터진다. 같은 종이, 같은 도면이라도 결을 어느 쪽으로 두고 인쇄하느냐에 따라 완성도가 갈린다.
결을 확인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종이를 가로세로 양방향으로 살짝 휘어 보면, 더 매끄럽게 휘는 쪽이 결의 방향이다. 인쇄소에서 '세로결지'와 '가로결지'를 구분해 주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접는 선이 많은 구조물일수록 이 한 끗이 완성도를 가른다.
여기에 코팅의 유무, 친환경 인증지(책임 있게 관리된 숲에서 나온 종이임을 표시하는 FSC 같은 인증) 여부까지 더해지면 선택지는 더 늘어난다. 손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결정이지만, 결과물의 수명은 대개 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갈린다.
오세기 · PE Studio 대표
2013년 Paper Engineering Studio(구 액션크래프트)를 설립해 지기구조 설계 특허 11종을 보유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2회 수상했습니다. 페이퍼토이·팝업북·오토마타 등 움직이는 종이 구조를 직접 설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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