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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종이였을까 — 13년째 종이를 고집하는 이유
소재2025년 3월 15일글쓴이 오세기 · PE Studio 대표

왜 하필 종이였을까 — 13년째 종이를 고집하는 이유

종이를 한 번 접으면 그 자리에 선이 남는다. 그 선을 13년 동안 들여다보며 일했다. 왜 다른 재료가 아니라 종이였는지에 대한 이야기.

종이를 한 번 접으면 그 자리에 선이 남는다. 펴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 선을 13년 동안 들여다보며 일해 왔다.

2013년에 스튜디오를 시작할 때, 왜 하필 종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더 튼튼한 플라스틱도 있고, 더 고급스러운 금속도 있는데 말이다. 그때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안다.

사실 종이는 내가 고른 재료라기보다, 내가 하던 일이 종이였다. 시작은 접는 도안이었다. 움직이는 종이접기를 그려 『합체! 전투기 종이접기』 같은 놀이책으로 묶던 시절이 있었다(길벗스쿨, 2020). 그 종이가 좋아서 손에서 놓지 못하다 보니 어느새 13년이 됐다.

만만해서, 그래서 어렵다

종이는 누구나 만질 수 있는 재료다. 아이도 접고, 노인도 접는다. 진입 장벽이 없다. 그런데 그 만만함이 설계자에게는 가장 어려운 조건이 된다.

평면 한 장이 스스로 일어서서 입체가 되고, 손잡이를 당기면 팔이 움직이게 만들려면 종이의 결과 두께, 접히는 각도를 전부 계산해야 한다. 우리가 지기구조 설계로 특허 11종을 받은 것도 결국 이 단순한 재료를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였다. 쉬운 재료일수록 설계는 정직해야 한다.

AI 자동 생성 출력만 받는다 VS 직접 손으로 만든다
▲ AI가 결과물을 만들수록, 인간의 인지·운동 발달은 직접 손을 쓸 때 일어납니다.

손에 남는 감각

종이에는 기억이 있다. 한 번 접힌 자리는 다음에 더 쉽게 접힌다. 종이를 다루다 보면 재료가 사람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한 번 지나간 자리는 흔적으로 남고, 그 흔적을 따라 다음 움직임이 결정된다.

현대백화점, 경주박물관, 수원시 일을 하면서 650건이 넘는 작업을 거쳤지만, 매번 처음 종이를 접을 때의 감각은 비슷하다. 손끝에 닿는 저항, 접히는 소리. 화면 속에서는 끝내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다른 재료를 안 써 본 것은 아니다. 아크릴도, 목재도, 3D 프린팅도 곁눈질해 봤다. 그때마다 결국 종이로 돌아온 이유는 단순하다. 종이는 실수를 빨리 보여 준다. 접어 보면 그 자리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안다. 손과 재료 사이에 군더더기가 없다.

13년이 지나도 답은 거창하지 않다. 종이는 다루기 쉽고, 그래서 끝이 없다. 나는 아직 이 재료를 다 모른다. 그게 계속 종이 앞에 앉는 이유인 것 같다.

오세기 · PE Studio 대표

2013년 Paper Engineering Studio(구 액션크래프트)를 설립해 지기구조 설계 특허 11종을 보유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2회 수상했습니다. 페이퍼토이·팝업북·오토마타 등 움직이는 종이 구조를 직접 설계합니다.

회사·설계자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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