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샘플을 먼저 만든다는 원칙
말로 설명하는 대신 샘플을 먼저 만들어 보냅니다. 손해처럼 보이는 이 순서를 바꾸지 않는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저희는 계약서보다 샘플을 먼저 만들어요.
말로 다 설명할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런데 움직이는 종이는 말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팔이 어떻게 올라가는지, 펼쳤을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아이 손에서 몇 번을 견디는지 — 이런 건 글로 적으면 거짓말에 가까워져요. 그래서 설명을 줄이고, 진짜 종이를 깎아 우편으로 보내 드립니다.
손에 쥐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샘플 하나를 만드는 데도 도면을 그리고, 칼선을 앉히고, 시제품을 몇 번이나 접었다 폅니다. 기간으로는 2주쯤, 비용으로는 100만 원 안팎이 드는 일이에요.
사실 손해에 가까운 과정입니다. 의뢰가 계약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샘플은 그대로 비용이 되니까요. 그런데도 이 순서를 바꾸지 않는 이유는, 손님이 종이를 직접 쥐어 보는 순간에만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화면으로 볼 때는 "괜찮네요" 하시던 분이, 실물을 받고 나면 비로소 진짜 질문을 하세요. 여기를 조금 더 단단하게 할 수 없냐고, 이 부분이 아이에겐 어렵지 않겠냐고.
그 질문들이 저는 반갑습니다. 그제야 같은 물건을 보며 이야기하게 되니까요. 샘플은 영업 도구가 아니라, 대화를 시작하는 공통의 언어예요.
좋은 결과는 늘 좋은 샘플에서 나왔습니다
2013년에 시작해 650건 넘게 일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이거예요. 현대백화점이든 경주박물관이든, 처음 보낸 샘플이 시원찮으면 끝까지 어딘가 삐걱댔습니다. 반대로 첫 샘플에서 손님과 저희가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되면, 그다음은 신기할 만큼 매끄러웠어요. 그래서 샘플 만드는 시간을 아끼지 않습니다. 가장 비싼 단계처럼 보여도, 지나고 보면 가장 싼 단계였어요.
먼저 만들어 보내 드립니다. 저희가 일을 시작하는 방식이에요.
오세기 · PE Studio 대표
2013년 Paper Engineering Studio(구 액션크래프트)를 설립해 지기구조 설계 특허 11종을 보유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2회 수상했습니다. 페이퍼토이·팝업북·오토마타 등 움직이는 종이 구조를 직접 설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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